[나의 실험실 이야기] 그만 투덜거리면 안 될까요?...책임감에 대해서
종합 / Bio통신원
hbond (2022-11-14)

저의 글은 정확한 지식이나 권고를 드리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연구실에서 경험한 것을 여러분과 글로 나누고, 일에 매진하시는 우리 연구자들에게 잠깐의 피식~하는 웃음 혹은 잠깐의 생각, 그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면(3초 이상) 안 그래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여러분의 뇌세포가 안 좋아지니, 가볍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만 투덜거리면 안 될까요?...책임감에 대해서


유세포분석(FACS, flow cytometry)을 할 일이 생겼습니다. 세포 주기(cell cycle)와 세포 사멸(apoptosis) 실험의 분석을 위해서입니다. 여러 학문의 경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항상 샘플을 준비만 했고, FACS 연구실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측정과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이 분들은 매일의 업무가 FACS라서 그런지 정말 일을 잘합니다. 그런데 최근 학교에 대규모 변화가 생겼고, 이전에 일하시던 분들이 퇴직하시면서 새로운 담당자가 왔습니다. FACS 연구실에 시간을 예약하고, 샘플을 준비해서 갔습니다. 새로운 담장자는 젊은 분이셨는데, 말투부터 불친절했습니다. 강한 외국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시면서, 그냥 '네가 알아서 들으려면 들으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고, 계속 투덜대며 일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분은 '갑'이고, 저는 '을'입니다. 돈을 내고 맡기는 샘플이지만, 어쨌든, '을'은 '을'입니다. 첫날은 세포 사멸 실험이었는데, 실험실의 FITC 시약이 오래돼서 그런지, 어떤 샘플은 데이터가 잘 나오는데, 어떤 샘플은 FITC 시그널이 없이 PI 시그널만 보입니다. 마음속으로, '시약을 새로 주문해서 다시 헤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FACS 담당자분은, 측정하는 내내, 데이터가 구리다면서(?) 계속 투덜댑니다. 그렇게 어찌어찌 마무리가 됐습니다. 데이터 분석은 어떻게 하겠냐고 묻길래, 그냥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하고 돌아왔습니다.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공짜로 샘플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내고 찍는데, 왜 그 담당자는 일하는 내내 투덜거리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연구실에 FlowJo 프로그램이 있어서 직접 분석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사용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생화학 실험을 주로 하는 친구에게 도와 달라고 하니, 일단 컴퓨터에 프로그램 설치하고, 로그인해서 들어가라고 합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약속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친구입니다. 그동안의 행적만으로도 여러 번 입증됐습니다. 그래서 알려준 대로 FlowJo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로그인 한 뒤, 그냥 구글에게 물어봅니다. "하이, 구글, flowJo 사용법을 알려줘." 구글이 알려준 여러 가지 해답 중, 일단 flowJo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 짧게 숙지한 뒤, 동영상을 선택해서 하나하나 확인을 합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분석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해결이 안 됐는데, 제 프로그램에는 x, y 축에 PI, FITC라는 옵션이 없습니다. '이거 어떡하지?' 아무리 구글에게 물어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생화학 학생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여기까지는 왔는데, 여기서 어떻게 x, y 축을 바꾸니?" 다행히 바로 알려줍니다. 이제 분석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프로토콜대로 염색이 안된 세포를 가지고 gating 작업을 합니다. 조심스럽게 gating을 마치고, 전체 파일에 적용하고, 하나하나 맞았는지 확인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분명히 낮에는 FACS 랩에서는 구리게(?) 보였던 apoptosis 데이터가 멀쩡하게 나타납니다. '아, 내가 뭔가를 실수했나 보다. 다시 gating을 하고, 다른 파일에 적용해서 점검합니다.' 몇몇의 데이터는 별로였지만, 대부분의 데이터는 멀쩡하게 apoptosis를 보여줍니다. '뭐지?'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날로부터 하루 이틀 지나서 세포 주기 샘플을 들고 갔습니다. 그리 반갑진 않았지만,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샘플 측정을 시작합니다. 바로 투덜댑니다. 제 몽타주가 '투덜'을 유발하는 모습이던가, 아니면 이 담당자는 전생에 투덜이 스머프였던 것 같습니다. '을'답게 행동했습니다. 최대한 조용히, 묻는 말에만 대답했습니다. 담당자는 초기 설정값을 조정하고, 측정을 시작합니다. 유세포 분석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일단 파라미터 잡히고 나면, 단순히 그냥 측정입니다. 24시간 샘플을 다 마치고, 48시간 샘플을 측정하는데, 갑자기 미리 설정한 값에서 벗어난 데이터가 나옵니다. 그러자 바로 투덜댑니다. 또, 샘플이 구리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샘플을 해 보자고 말하고, 다른 샘플을 측정하니, 마찬가지로 벗어납니다. 계속 다른 샘플을 시도했는데, 데이터는 앞서 측정한 설정값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턴을 보입니다. 상식적으로 한 두 개의 샘플이 그렇다면, 실수라고 생각이 되지만, 모든 샘플이 그렇다면, 완전 실수이거나 혹은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요? 하지만, 유세포 분석에 대해 까막눈인 제가 그 자리에서 대응할 방도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설정값 변경만 시도하다가 예약된 시간이 종료되고, 저의 샘플들은 측정되지 못했고, 나 몰라라, 등 돌리는 담당자를 보면서, Accountability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정도 역사가 있는 대학들의 본관에 가 보면, 학교의 설립이념, 교육목적에 Accountability라는 단어가 자주 포함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책임/책임감 정도로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책임감 있게 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서로의 신뢰가 깨어지고, 같이 일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요즘은 책임감 있게 일하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책임감 없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몇 주 전에 같은 과의 어떤 교수님과 학과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냉동고 얘기를 하다가, 같은 단어가 나왔습니다. '도무지 요즘은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저도 스스로 깊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는 책임감 있게 일하는 사람인가?'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결국 그날, 측정되지 못한 샘플을 들고 터덜터덜 돌아왔고, 측정된 샘플들의 데이터를 flowJo로 분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컴퓨터 모니터에서 보였습니다. FACS 연구실에서 측정한 데이터를 flowJo로 다시 분석을 하니, 측정이 어렵다고 했던 48시간 샘플 데이터의 모습처럼 표현되었고, 저는 그것들을 분석을 해서 아주 훌륭한 세포 주기 데이타를 얻었습니다. 혹시라도 실수했나 싶어서 같은 연구실의 다른 사람과 함께 분석을 진행했는데, 같은 결과입니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모든 샘플을 측정했을 것을, 제가 무지해서 데이터를 얻지 못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유세포 분석실 매니저에게 항의를 할까 생각을 해봤는데, 그냥 유세포 분석을 제가 직접 할 수 있도록 training 신청을 해이겠습니다. 그게 최선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일을 하다 보면 비슷한 일이 있지 않으세요? 저와 같은 경우는 아니더라도, 일은 막히고, 사람에게 실망하는 일 말입니다. 이때, 핵심만 고려하면 어떨까요? 상대방의 페이크에 휘말리지 않고, 그 일의 본질만 생각하면, 의외로 일이 풀릴 수도 있습니다. 제게 핵심은 FACS 데이터였기에, 이제부터는 제가 직접 측정해서 분석하는 것이 그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투덜이는 그냥 계속 투덜대라고 하죠, 뭐.

오늘도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보출처: BRIC 바이오통신원
<본 기사는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 또는 개인에 의해 작성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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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깡썽  |  2022.11.14 22:04     
담당자가 갑인것 어딜가나 비슷하군요...ㅎㅎ 그래서 저는 잘부탁드린다는 말과 함께 간단한 음료같은 작은 선물을 준비합니다. 특히나 처음오신분들은 뭔가 "연구자들한테 약해보이면 안돼! 첫인상에 밀리면 안돼!" 같은 다짐이 있으신건지 방어적인 분들이 가끔 계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살짝 부드럽게 접근하면서 당신의 전문성을 인정한다는 포지션으로 가면 어느새 제 샘플을 본인 샘플처럼 잘 해주시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Accountability가 있으신 분들은 당연히 잘해주시겠지만... 그렇지 못한분을 만나면 날아가게 되는것은 제 샘플, 제 데이터이다 보니까 ㅋㅋ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담당자분들과 친분 쌓기 스텝을 거치는 편입니다.
hbond  |  2022.11.15 01:42     
깡썽 님, 댓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댓글을 보니, 삶의 지혜와 내공이 대단하신 분으로 생각됩니다. 맞습니다, 좋은게 좋은것이죠. 저도 위의 글을 쓴뒤, 그 다음주에 찾아갈 때, 괜히 친한척도 하고, 계속 웃는 얼굴로 서 있으니까, 담당자분께서 조금은 덜 화를 내시더라고요. 다음에는 더 많이 빵끗 웃어야 겠습니다. ㅎㅎㅎ. 좋은 내용을 나눠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안녕난세포야  |  2022.11.15 10:40     
FACS 유저로써 ... 저정도면 작동법을 제대로 모르는거아닐까요? 걍 딱 cell 처음 5000~1만개 정도 굴려서 나오는 dot보면 답나오는걸..
하지만 사회생활이야뭐... 첫댓분 말처럼 선한 인상 심어주는게 윈윈인듯합니다
hbond  |  2022.11.16 02:37     
안녕난세포야 님, 반갑습니다. FACS 유저셨네요. 왠지 더 반갑습니다. 주변에 얘기를 들어보니 Flow cytometry를 주력으로 사용하시는 연구실들이 많더라고요. 저는 세포 실험 몇 개 정도, 지금까지는 한 4-5개 정도의 실험에 FACS를 사용했는데, 제가 하는 일의 한 부분이다 보니 깊이있는 지식이 없어서, 사실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댓글로 다시 뵙게 되니 좋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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