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포닥 엄마의 생존기] 코로나가 미친 영향
종합 / Bio통신원
오박사 (2022-09-22)

밖을 바라 보는 딸

[밖을 바라 보는 딸]


2020년 1월에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3월 캐나다에도 코로나가 강타했다. 사전 승인받은 위급한 연구가 아니고서는 연구동에 들어가지 못하는 rule로 2개월 만에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재택근무의 실체를 모를 때는 좋았다. 아이를 두고 일하러 가야 한다는 죄책감에 눌려있었던 나는 아이랑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재택근무가 마냥 좋을 것만 같았다. 나에 참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이랑 같이 있으면서 일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 당시 one bed에 살았으므로 안방에 들어가 일을 하면 돌이 안된 어린 딸아이는 하염없이 문을 두드렸다. 이런 아이를 무시하고, 일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코로나가 강타한 이 시점에 카페나 public 한 다른 장소로 가는 것도 위험해 아이를 재우고, 거실에서 일하고, 아이 재울 땐 거실 불이 안방으로 들어갔으므로, 화장실 변기에 앉아 논문 보고 공부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추억이지만, 그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니까 싶기도 했었다. 

코로나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한국행 비행기는 없어지고, 가려면 캐나다 미국 한국 여러 환승을 거쳐야지만 갈 수 있게 되었고, 결국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심해 어린 딸을 데리고도 갈 수도 없었고, 캐나다에 두고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글은 덤덤하게 썼지만,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동생 결혼 가족사진에 내가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코로나가 모든 일상을 파괴해 놓았다. 또한, 마트 말고는 모든 시설이 강제적으로 문을 닫아야 했고, 주변 사람 중 셋 중에 하나는 실직하는 현상을 보았고, 캐나다에서는 휴지가 동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한인들 사이에서도 쌀이 수입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소문에 한동안 쌀값도 오르고, 구하기 힘들어질까 불안에 떨어야 했었다. 장 보러 가는 것도 무서워 2 주치 장을 보고, 야채와 고기들을 냉동고에 얼려 장 보러 가는 횟수도 줄 일려고 했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주는 사람들이 협조적 이어서 다른 주에 비에 코로나 확진자 수도 적었어고, 정말 길에 사람들이 다니지 도 않았다.

재택근무 한 달째, 코로나로 재택근무기간이 점점 길어져, 학교에서는 정말 essential worker 말고는 자를 수 있는 연구원들을 내보내고, 임금을 줄이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코로나로 학교에 주차장, 기타 상업시설로 돈을 벌 수 없으니 임금을 줄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땐 정말 심각했었다. 전염병 하나가 모든 일상을 바뀌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외국인 연구원들이 잘리게 되면 비자에 문제가 생기는 연구원들이 많아 캐나다를 떠나야 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어서, 보스가 이 부분에서는 엄청 애쓴 걸로 안다. 정말 이 부분은 보스에게 너무 감사하다. 6개월 뒤 코로나 상황이 조금 나아져, 하루 4시간 permit을 받아 다른 연구원들과 겹치지 않게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로 내 연구는 8개월 동안 파이펫 한 번도 잡아 보지 못했다. 

코로나가 휩쓴 지 2년이 지난 지금, 많은 것이 정상화되어가고 있지만, 내 연구성과 및 경력에 대한 조급함은 솔직히 남아 있지만, 재택근무로 많은 논문을 읽고, 공부할 수 있었으며,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일 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로만 내 인생에 의미를 남겨두려고 한다. 

정보출처: BRIC 바이오통신원
<본 기사는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 또는 개인에 의해 작성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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