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실험실 이야기] 프롤로그
종합 / Bio통신원
hbond (2021-05-12)

[프롤로그]

그날도 나는 여느 다른 날처럼 같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내일을 마지막으로 이 복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계약이 만료되어서 연구실을 떠나야 했다. 어디를 가고 있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걷고 있었다. 앞에서 한 사람이 걸어온다. 내가 먼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How are you?" "Good, what about you?" "Good, thanks." 이 동네는 이게 문화다. 알던, 모르던, 사람이 지나가면 인사를 한다. 그렇게 서로를 지나쳐 가는데, 그 사람이 나를 부른다. "Hey, you want to work with me?"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돌이켜 그에게 물었다. "Excuse me?"
 

나의 실험실 이야기


나는 그렇게 바이오 관련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사람도 나를 잘 모르고, 나도 그 사람을 잘 몰랐는데, 그냥 내게 그 말이 하고 싶었다고 한다. 나 역시,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봤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몇 번 안면이 있는 정도였다. (대화를 해 본 적은 없고, 그냥 얼굴이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하는 정도였다.) 서로 다른 번호의 버스를 타기에 몇 번 본 정도였다.

그렇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의 연구 경력은 물리화학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갑자기 생물무기화학을 하자고 하니 얼마나 황당한가? 그러나 그가 한 말이 아주 재미있게 들렸다. 대충 이렇게 말했다. '헤이, 나는 네가 하는 일을 모르고, 너는 내가 하는 일을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 둘이 같이 일을 하면 아주 새롭고, 엄청난 것이 나올 수 있을 거야.' 지금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았지만, 아무튼 해 보기로 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한 이면에는 나의 연구 경험들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나는 물리화학 중에서 분자빔을 이용한 기체화학을 연구했는데, (연구가 다 어렵겠지만) 기체화학은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졸업하면 별로 할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공부한 학교는 많은 사람들이 그 연구를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런 연구 경험이 있다 보니, 다른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였다. 합성 유/무기 화학, 세포를 이용한 in vitro 실험들, 나중에는 쥐를 이용한 동물실험까지. 지난 4년을 그렇게 정신없이 보냈다.

5월이다. 새로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은 벌써 두 달이 지났고, 박사과정 학생들은 2년에서 5년 정도 지났을 것이고, 연구원으로 일하시는 분들은 더 많은 시간들이 지났을 것이다. 처음 연구실에 들어서던 날과는 달리, 이제는 많은 것들이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이제는 많이 익숙한 연구실 생활,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낯선 연구실 생활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었던 연구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전히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경험들을 나눠보고 싶어서 연재를 결심했다.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분들이 생물학 관련 연구를 하고 계실 것이다. 기초적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혹은 실력 있는 선배들과 함께 일하면서 연구를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냥 깡통 상태에서, 인터넷을 스승으로 삼아 일을 배웠다. 내 생각에는 연구실 생활을 하는 분들이라면 내가 들려드리는 이야기에 적잖이 공감하시리라 생각한다. 연구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 연구실 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 그리고 학생/연구원으로 여러 가지 고민이 있으신 분들에게 말이다.
 

[화학 합성]

아무런 생각 없이 첫날 연구실에 갔다. 다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첫날이 제일 행복한 날이다. 왜냐하면 기대치가 너무 낮아서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스는 새로 부임한지 반 년 된 분이었다. 나는 이 연구실의 유일한 포닥이지만, 나보다 이 연구실의 경력이 6개월이나 높으신 박사과정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친절하게도 그중의 한 학생이 나에게 일을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화학합성을 하는지를 말이다. 이삼일 정도 그 학생에게 일을 배우면서 같이 실험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원하는 생성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관련된 논문이 있냐고 물었더니, 알려준다. 홍콩 연구자들의 논문인데, 생성물의 수율이 60%를 넘게 나온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우리는 60%는 커녕 6%, 아니 NMR 스펙트럼에 흔적도 안 나온다. 나를 지도하던 학생말로는 이 실험을 4-5개월 정도 하고 있는데 잘 안된다고 했다. (사실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랐다. 지도 교수님의 인내심과, 학생의 끊임없는 도전 정신에 놀랐다.) 홍콩 연구자들의 논문을 보니, 최초로 합성한 사람들은 일본 연구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논문을 찾아보니 수율이 25% 정도였다. 그리고 두 단계 반응으로 보고되었다. (홍콩 연구자들은 한 단계 반응으로 묘사했었다.) 그래서 일본 연구자들의 방식을 따라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생성물이 나왔다. 수율이 대략 15-20% 정도였지만 생성물이 나온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 반응은 섭씨 95도 정도로 밤새도록 가열하는 반응이었는데, 반응물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수율이 매우 중요했다. 일본인 논문과 비슷한 수율은 나왔지만 홍콩에서 발표한 수율과는 너무 큰 격차가 있었다.

자세한 설명도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반응 용액을 쳐다보았다. 95도로 끓고 있는 반응 용액을 쳐다보면서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하면 생성물을 더 얻어 낼 수 있겠니?' 반응 용액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상이다. 만일 어떤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바로 병원으로 가야만 했을 것이다. 반응 용액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응 용액은 둥근 플라스크를 통해서 그 자신을 내게 온전히 보여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활용'. 그렇다, 재활용이다. 생성물은 침전물로 플라스크 바닥에 가라앉게 되는데, 필터링을 한 뒤, 걸려진 용액을 다시 끓여 보기로 했다. 정말로 다시 침전물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두서너 번을 재활용하니까 홍콩 연구진의 결과와 비슷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가 나를 부르더니, 전자레인지에서 반응을 시도해 보자고 한다. 어떤 논문을 읽었는데, 그 연구팀은 전자레인지로 반응을 보냈다고 한다. 너무 황당했다. 전자레인지는 음식을 데워 먹을 때 쓰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알겠다고 대답하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전자레인지를 사용하는 경우, 정확한 반응 조건을 기술할 수 없어서 추천되지 않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인기 있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도전해 봤다. 잘되지 않았다. 다시 보스가 불러서 밀폐된 용기에서 압력을 높여서 시도하자고 한다. 그래서 해 보았다. 소위 말하는 Hydrothermal이라는 방식인데, 나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나타났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두 단계 반응이 한 단계 반응으로 축소되고, 무엇보다도 수율이 좋다. 최고 신기록은 90%를 조금 넘길 정도였다. 지금도 잘 쓰고 있는 방법이다. 
 

나의 실험실 이야기


포닥 혹은 연구원은 결과로 그 가치를 입증한다. 불편한 이야기지만, 가치가 없으면 계약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았기에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무지 애를 쓴 것 같다. 오죽하면 반응 용액에게 말을 걸었을까? 혹시 실험이 안된다면 당신의 실험 용액 혹은 세포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대답을 기다려보라. 어리석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노력을 수반하는 간절함은 반드시 길을 찾게 도와준다고, 나는 믿는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보출처: BRIC 바이오통신원
<본 기사는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 또는 개인에 의해 작성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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