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에게 보내는 철학 서신] 1-4 “조작적 관점에서” (2) 축소주의를 권함
오피니언 / Bio통신원
갑오징어 (2020-02-27)

일러두기

※ 브리지먼의 논의는 다음 원전을 바탕으로 소개한다.
    P. W. Bridgman, The Logics of Modern Physics, Macmillan, 1958. (1927년판과 사실상 같다. 본문에서는 『논리』라고 지시하기로 한다.)

※ 네 번째 에세이는 브리지먼의 '조작주의'를 소개하고 관련된 주제에 대한 논평을 제시하는 부분으로, 분량이 길어 네 개로 나누어 업로드될 예정이다. 이번 부분은 브리지먼의 원전이 다루는 좀 더 세부적인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이다. 
 

4.2.2.2 다시, 구심력과 원심력: ‘상대성’의 두 의미

과학적 개념의 상대성(relativity)에 대한 브리지먼의 논의 역시 ‘구심력’과 ‘원심력’이라는 틀을 활용해 이해해야 좀 더 정확하고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다. 브리지먼이 언급하는 상대성은 크게 두 의미다. 먼저, 어떤 과학적 개념은 그것을 측정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다른 개념들을 가정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과학적 개념의 의미론은 다른 개념에 의존해 있다. 또한, 어떤 과학적 개념이 측정하는 경험적 대상은, 다양한 종류의 물리적 효과에 의해 영향을 받고, 이에 따라 주변 대상이나 힘에 대해 상대적으로만 서술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경험적 대상들은 말하자면 인식적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상대적이다. 안타깝게도 브리지먼은 이 두 ‘상대성’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차분히 살펴보면, 과학적 개념의 의미론이 상대성을 가졌다는 평가는 개념 사이에 있는 일종의 ‘구심력’, 응집력을 염두에 두고 있는 평가이며, 경험적 대상 사이에 상대성이 있다는 평가는 과학적 개념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원심력’을 염두에 두고 있는 평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과학적 개념의 의미론과 관련된 상대성을 이해하기 위해, 길이에 대한 그의 서술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본다. 길이의 측정 과정에는 수많은 다른 물리적 개념들이 결부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길이와 관련된 개념으로 브리지먼이 직접 언급한 온도, 중력, 전자기력, 속도, 빛, 역학, 전자 모두는 이들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개념들이 필요하다. 최근의 국제단위계가 활용하는 단위 역시 다른 많은 개념들의 체계 속에서 규정되고 있다. 1) 이들 개념들의 그물망은 서로의 의미와 용법을 구속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과학적 개념이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이렇게 형성되어 있는 의미론적 체계가 실제로 경험과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이 브리지먼의 조건일 따름이었다. 이렇게 보면, 과학적 개념이 가진 구심력은 해당 개념들의 의미론 차원,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의미론적 체계와 경험 사이의 대응 관계 차원 두 차원으로 이뤄진 성질인 셈이다.

상대성의 인식적, 형이상학적 의미를 살펴보는 과제를 위해서는, 다시 브리지먼의 실제 논의를 활용해도 좋아 보인다. 그가 생각하는 ‘상대성’의 반대말은 ‘절대성’이다. 이는 길이와 같은 개념은 다른 종류의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또는 그것이 가진 일정한 존재론적 특징에 의해 규정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일례로, 길이가 ‘절대적’이라면 이는 자연 속에 있는 객관적인 실재로서 인간과 같은 주변의 조건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물체 자체가 변형되지 않는 한 동일한 물리량으로서 유지될 것이다.

브리지먼이 물리량의 객관적 개념과 대비하는 ‘상대성’은 상대성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개념이다. 언급했듯 상대성 이론은 고속으로 이동하는 막대는 그 길이가 수축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따라서 물체의 길이는 그 자체로 물체 주변의 조건에 따라 변형된다. 다른 많은 물리량 역시 주변의 역학적 조건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브리지먼이 활용하는 상대성과 절대성이라는 두 대립 용어는, 먼저 물리학 이론이 제시하는 형이상학의 영역에, 그 다음에는 경험을 통해 관찰 가능한 인식의 영역에 조명을 비추고 있다. 상대성 이론이 지적하는 현상, 즉 실제로 물체의 길이가 변형되는 현상은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좀 더 상식적이지만 막대와 측정 대상에게, 그리고 빛과 측정 대상의 길이에 동시에 영향을 주는 현상이 있다는 사실은 우선적으로는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과학자의 실험 속에서 드러나는 이상 인식의 영역에서도 효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의미론적, 인식적, 나아가 형이상학적 상대성까지 옹호하는 것이 브리지먼의 입장이라면, 그의 입장은 앞서 살펴본 논리경험주의의 직관과 중요한 차별점을 가지는 것 같다. 논리경험주의가 지식의 구조에 대한 이론에서 토대론에 좀 더 기울어져 있다는 점은 이미 앞 절에서 다룬 대로다. 그리고 토대론의 핵심은, 지식의 체계는 기초적 주장(대체로 경험 진술)과 여기에 기반을 둔 상위 주장(대체로 이론적 진술)로 구성된다는 데 있다. 그런데 브리지먼은, 개념간의 상대성을 언급하면서 이런 토대론적 구조보다는 정합론적 구조에 좀 더 기울어진 진술을 한다. 물리학의 기초가 되는 길이, 시간 등의 개념조차도 다른 (실제로도 그렇다) 개념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정의될 수도, 측정될 수 없다면, 물리학은 별도의 기초 진술 없이 구성된 진술 체계라는 의미에서 정합론적 구조를 가진 지식의 체계일 것이다. 콰인의 공격에 앞서, 이미 논리경험주의의 토대론적 관점에 대한 비판이 그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것 처럼 보였던 브리지먼의 논지 속에서 나타났던 것 같다.

측정할 대상, 그리고 측정할 것 모두가 이처럼 상황에 따라 변형되는 상황 아래에서, 믿을만한, 그리고 서로 다수의 비교동등성을 가진 절차에 기반한 과학적 개념을 대체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지는 결국 이들 물체와 물질의 변형 정도에 대한 경험적 탐구에 기대어 탐사해야 하는 영역이다. 이러한 경험적 탐구가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 또는 논란은 오늘의 과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이번 에세이 후반부는 이와 관련된 논의를 다루기로 한다.

미터 원기 복제품.

그림 1. 미터 원기 복제품. 1889년 제정, 1960년까지 사용된 미터 원기 복제품의 모습. 파리 인근 세브르 구에 위치해 있는 국제 도량형국 경내에 있다고 한다. 원기를 올려놓을 받침대의 모양으로 인한 응력 변형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정밀한 구조 역시 속도로 인한 변형은 전혀 막을 수 없다. 브리지먼 등의 이러한 지적이 널리 알려져서인지, 1960년 미터의 정의는 구체적인 물체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미지는 다음 페이지에서 얻었으며, AP 촬영. https://www.kidsnews.com.au/mathematics/the-world-is-about-to-agree-to-update-the-definition-of-a-kilogram-changing-maths-forever/news-story/f5e66174f0a875207a5b48d6349eecd9 캡션 서술에는 BIPM(Bureau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sures, 국제도량형국)의 홈 페이지를 참조했다. https://www.bipm.org/

 

4.2.2.3 무의미와 인식불가능 사이: 의미론과 인식론

브리지먼의 논의 전반을 좀 더 세밀하게 다루기 위해, 논점을 조금 바꿔본다. 브리지먼은 ‘의미’만큼이나 ‘무의미’에 대해서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과학적 개념의 의미론이 무력해지는 지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조작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지점은 결국 과학적 개념이 경험, 즉 측정 절차와의 연결을 잃어버리게 되는 지점이다. 아마도 많은 영역에서, 측정 기술의 한계점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측정 기술이 아직 부족하여 경험과 연결하지 못하는 ‘무의미’는, 조작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현실적인 무의미라고 분류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무의미를 과학계는 언젠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역에서 발전할 개념은, 말하자면 ‘원심력’을 통해 새롭게 측정 가능해진 영역에 적용될 것이고, ‘구심력’을 통해 이들 새로운 측정은 기존의, 또는 다른 여러 폭넓은 경험적 대상과 연결될 것이다. 

그러나 브리지먼은 현실적 ‘무의미’ 너머의, 말하자면 필연적인 ‘무의미’ 역시 주목한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개념 가운데 경험적 측정이나 경험적 조작과 원천적으로 연결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 ‘신’을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길이나 질량을, 또는 이런 것들이 아닌 어떤 것이 되었든 신의 속성을 측정할 수 있을까? 신과 관련된 어떤 것을 조작해야 신의 현존이 드러날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개념에는, 원심력도 구심력도 적용이 원천 차단되어 있는 듯하다. 다양한 상황에 알맞은 다수의 경험적 절차를 적용하는 작업이 불가능한 이상, 이들 경험적 절차가 내놓은 결과 사이에서 비교동등성을 확보하는 절차, 즉 구심력을 확보하는 작업 역시 가능하지 않다. 

이처럼 조작적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으로 ‘무의미한’ 아래 질문들은, 말하자면 형이상학을, 플라톤의 턱수염을 무성하게 만든다. 

1 물질이 존재하지 않던 시점이 있을까?
2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까?
3 시간은 왜 흐르는 것인가?
4 공간은 제한되어 있을까? 
5 공간과 시간은 불연속적인가? 
6 공간은, 직접 탐지할 수는 없으나 추론을 통해 탐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네 번째 차원을 가질까? 
7 우리의 탐지 범위를 늘 넘어서 있는 자연의 부분이 존재할까?
8 내가 ‘파랑’이라고 부른 감각 경험이, 내 이웃이 ‘파랑’이라고 부르는 감각 경험과 정말로 동일한 것일까? 내 감각 경험에 따르면 빨갛게 보이는 물체가, 내 이웃의 동일한 감각 경험 속에서는 파랗게 보이는 경우가 과연 가능할까? 2)
9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자연수의 수열 가운데, 빠져 있는 수가 있을까?
10 2+2가 4가 아닌 우주가 가능할까? 
11 왜 음전하를 띈 물체는 양전하를 띈 물체를 이끌어들일까? 
12 왜 자연은 법칙을 따르는가?
13 자연 법칙이 지금과 다른 우주도 가능할까?
14 우리 우주의 어떤 부분이 나머지 부분과 완전히 고립되어 있을 때, 이 부분은 계속해서 우리 우주의 법칙을 따르고 있을까?
15 우리는 우리의 논리적 추론 과정이 타당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 (『논리』 30-31쪽)

나는 방금 정리한 논의에 대해 하나의 비판, 그리고 하나의 옹호를 제시하고 싶다. 

1.    브리지먼이 이들 ‘플라톤의 턱수염’이 무의미하다고 논평한 것은, 의미론과 인식론 사이의 혼동, 또는 논의의 두 층위 사이의 차이를 무시한 데서 기인한 평가처럼 보인다. 나는 경험적 측정 절차를 통해 참인지 아닌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주장이 있으며, 그 유력한 후보가 제시된 15개 질문이라는 데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식론, 특히 경험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의미의 세계는 경험 과학보다 넓다. 자연언어의 문장은 경험 과학이 거짓이라고 밝혀낸 것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 조차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각이 모두 둥근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무한히 크다”라는 문장은, 분명히 올바른 형식을 가진 문장이지만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의미론의 자율성을 간과한 결과, 굳이 받지 않아도 되었을 오해가, 즉 그가 외형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했던 논리경험주의자들과 비슷하게 말하자면 헛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사이의 경계를 짓는 것이 브리지먼의 주요 과업이라고 보는 오해가 널리 퍼지고 말았다. 물론 ‘조작적 관점’과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반 형이상학, 또는 경험주의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작주의는, 특히 (수천년에 걸쳐 자라난 다양한 플라톤의 턱수염에 여전히 관심이 많은) 철학자들보다는 물리학자에게 형이상학적 겸손을 요구하는 종류의 입장이라는 점에서, 구별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    방금 지적한 이유에서, 조작적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으로 무의미한 진술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진술을 옹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작적 관점은,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빠지기 쉬운 물리학의 특징에 대한 경험주의적 경고이다. 이 경고에 따르면, 다양한 유형의 경험 데이터와 연결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원심력을 가진 개념을 활용해 광범위한 영역에서 측정을 벌인 다음, 이렇게 원심력을 통해 얻은 다양한 경험적 절차의 측정 결과 사이의 일치를 확인하여 구심력도 확보해야 한다는 조작적 관점 이외에는, 경험 데이터와 과학적 개념을 잇는 방법을 생각하기 어렵다. 물리학에서는 이론을 통한 설명과 예측이 흔하게 이뤄지지만, 이 이론이 정말로 경험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조작적 관점에 따른 확장(원심력)과 개념 사이의 일치(구심력)을 확보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작업이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그리고 그럼에도 이런 영역으로 생각을 넘기기 쉬운 질문이 있다는 경고, 이에 따라 물리학이 도달할 수 없으나 생각이 도달하기는 쉬운 영역이 있다는 경고가 결국 브리지먼이 보내고자 했던 경고로 보인다. 

 

4.2.2.4 설명, 메커니즘, 모형: 과학의 목적에 대한 형이상학적 최소주의를 향하여

그러나 과학이 내놓는 예측, 과학의 개념, 과학의 모형처럼 말하자면 생각을 통해 도달한 내용을 표현하는 진술들과, 실험을 통해 얻는 경험 데이터 사이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간극이 늘 존재한다. 과학자들은 늘 이 간극을 넘는 선택을 하고(에세이 1-2 참조), 이 선택에서 과학자들이 엄격한 조작적 관점에 의해 인도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여기서 과학자들은, 이론이 지켜야 한다고 간주된 덕목(단순성 등)에 따라 자신의 실험 결과를 정리하고 데이터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자 한다. 

통상 이렇게 단순성을 추구하고 데이터가 말한 것 보다 좀 더 많은 것을 말하려 하는 입장은, 과학자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상(실험 결과)을 가능하게 하는 형이상학적 근거가 있다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부분에 대한 이론을 찾아내는 것을 과학의 궁극적 목표라고 보는 관점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조작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식의 ‘팽창주의’는 허용할 수 없다. 조작적 관점이 성립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원심력(구체적이고 여러 영역에 확장되어 적용 가능한 경험적 절차)은, 거의 모든 물리학이 사용하는 기본적인 개념인 ‘물체’에 대해서도 그리 원활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많은 물리학 이론은 ‘물체’는 경계가 명확한 것으로 가정한다. 하지만 실제 사물은, 말하자면 그 경계가 모호하여 외부에서 침투가 가능한 계면을 가질 따름이다. 이처럼 조작적 관점에서 볼 때 인식적으로 경험 데이터와의 연결이 미흡한 개념들의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최소주의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설명, 메커니즘, 모델, 기타 이론적 구성물에 대한 브리지먼의 논의는 모두 이런 최소주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    브리지먼은 과학이 제시하는 설명의 목적은, 여러 현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데 있다고 말한다. 『논리』에는 causation이 아니라 correlation이라는 표현이 명확히 적혀 있다. 이런 진술은 자못 놀랍지만, 조작적 관점의 내용을 감안하면 이러한 귀결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조작 절차를 통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경험 너머의 무언가가 아니라, 조작과 그 귀결 사이의 관계 뿐이고 이것이 상관관계를 넘는 인과관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한 차례의 비약을 거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리지먼은 경험의 영역을 넘어선 형이상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과학의 설명이 근본적으로 상관관계를 인식하는 활동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이를 통해 과학의 발전이 가진 체계성을 부인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 상관관계는 더욱 더 넓은 범위에 걸쳐, 그리고 체계적으로 확인되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세대의 물리학은 익숙한 영역에서의 설명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영역에서의 설명을 제시할 것이며, 실험을 통해 상관관계를 아직 확인하지 못한 광범위한 영역에 대해서도 미래의 실험을 예비하는 여러 이론들을 제안하게 될 지 모른다.

    메커니즘은 이런 설명의 과정에서 과학의 초점이 된다. 많은 과학자들은, 상관관계의 원인이 되어 설명하려는 상황을 일으키게 된 인과적 구조물, 즉 메커니즘이 자신이 확인한 데이터 배후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런 방향에 대해, 브리지먼은 충격적인 비유를 든다. 교리와는 부합하지 않는 육체의 정욕으로 괴로워하는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경험 데이터에 충실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와 부합하지 않는 욕구 때문에 과학자들은 괴로워할 수 있다는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충분히 실험과 부합한 것으로 밝혀지고 익숙한 영역으로 포섭된 여러 메커니즘들은 실재와 근사적인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리지먼이 인정하는 것은 거기까지다. 그는 메커니즘을 언제 실재라고 보아도 좋으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한 관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즉, 문제의 메커니즘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이 실험을 통해 밝혀져야만 그것은 실재다. 그런데 브리지먼은 이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라고, 다시 말해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경험적 발견이 가능하다고 선포하면서 『논리』의 본문을 시작하고 있다(2-3쪽). 그렇다면 그는 결코 메커니즘이 실재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셈이다.

    모형, 즉 물리학이 다루는 현상 가운데 초점이 될 만한 일부 요소를 골라 이들 요소가 다른 요소들과 가진 관계를 모사하는 수식이나 심적, 물질적 구조물은, 결국 상황을 단순하게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구성물(construct)은 이러한 모형을 위해 활용되는 각각의 항목 가운데 관찰 경험 속에서는 직접 확인할 수 없으나 다른 변수들을 통해 추론된 물리량 종류를 말한다.

: 브리지먼은 두 종류의 ‘구성물’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응력(stress), 그리고 전자기 마당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직접 관측할 수 없으며, 이론을 통해 관련을 가지게 된 지표의 값으로부터 추론하여 그 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종류의 대상이므로 구성물로 간주된다. 또한 이들 두 구성물은 <훌륭한> 것으로 평가 받는데, 이는 물체가 이러저러한 방식의, 이러저러한 규모의 응력을 받는 상태가 실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상태와 원칙적으로 일대일로 대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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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적 관점에서” 본 과학은, 무엇보다 더 넓은 경험적 범위에 대해 가능한 한 다양한 방법으로 측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식적 팽창(원심력), 그리고 이렇게 얻은 측정의 결과가 서로 부합하는지 이어붙여 보는 인식적 종합(구심력)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범위는 비록 지금은 과학이 다룰 수 없어 과학적 언어의 바깥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미래에는 과학의 언어가 포섭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작업을 원천적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형이상학적으로 팽창주의적인 여러 교설들이 쉽게 빠져드는 부분이다. 조작적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은 축소주의적 형이상학을 채택하는 신중함을 보여야 그 목표를 경험에서 벗어나지 않은 범위 내에 위치시킬 수 있다. 

 

4.3. 헴펠과 조작주의에 대한 오해


이번 에세이에서도 헴펠은 주요 등장인물이다. 브리지먼의 조작주의에 대한 철학계의 이해를 많은 부분 지배하는 논평을 자신의 교과서에 남긴 사람이자, 이를 통해 말하자면 브리지먼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는 데 큰 기여를 한 주석가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헴펠3)은 조작주의를 이른바 ‘해석 문장’의 해석 방식에 대한 논의라고 규정하면서 이 논평을 시작한다. 여기서 ‘해석 문장’이란 어떤 이론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적 개념을, 담화 참여자들이 이론에 앞서 이미 이해하고 있는 개념을 활용해 풀어 쓰는 문장을 말한다. 예를 들어, ‘미터’는 ‘길이’처럼 담화 참여자들이 이미 그 개략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유형 개념을, 그리고 거의 변하지 않고 안정된 기준과 그 구체적 내용이라는 조건의 개념을 통해 규정되어 풀어 쓸 수 있다. 자신의 교과서에서, 헴펠은 조작주의가 일종의 해석 문장 구성 방침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이론적 개념에 대해 여기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실험 정차인 조작 절차를 제시하는 것이 해석 문장을 구성하는 적법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헴펠은 무엇보다 조작주의를 해석 문장의 의미론에 대한 입장으로 축소해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조작적 관점’을 의미론에 국한시켜 보는 관점은 브리지먼이 정리했던 과학 개념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을 생략하고, 브리지먼의 주장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만 노린 입장이라는 점에서 지지하기 어렵다고 본다. ‘조작적 관점’은 이전보다 더 상세하고 조건마다 그 유형도 다른 절차로 나아가는 원심력, 그리고 이러한 원심력이 지나치게 멀리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정합성 조건인 구심력 모두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보아야만 했다. 비교적 신중하지 않았던 의미론적 진술에 집중하는 헴펠의 비판은, 조작주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노렸으되, 조작주의가 담고 있는 통찰은 언급하지 않는 비판처럼 보인다.

또한 헴펠은 브리지먼이 과학적 개념들의 체계를 구성할 때 과학적 개념의 체계적 의미를 강조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과학적 개념은 하나의 체계 속에서 쓰이며, 특히 그것을 사용하는 법칙과 이론, 메커니즘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쓰이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헴펠의 강조는 전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이런 과학 이론의 ‘매듭’으로서의 성격을 브리지먼이 몰랐던 것 처럼 서술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앞선 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확인했듯 브리지먼은 분명 과학적 개념의 인식적 상대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과학적 개념이 측정 절차가 부르는 원심력에 의해 대책 없이 확장되어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브리지먼의 주석가로서 헴펠은 적절하지 않은 주석을 내놓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측정 절차에 대한 헴펠의 분석 가운데, 브리지먼이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여 헴펠의 기여라고 볼 가치가 있는 설명은 다음 같다. 조작 절차는, 이론적 개념과 이런 이론에 대해 중립적인 경험 데이터 사이에 다리를 놓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길이를 자나 전자, 빛으로 측정하는 각종 절차는 길이의 개념과 길이에 대한 경험 사이를 정량적 방식으로 연결하는 ‘교량 원리’라고 부를 수 있다. 브리지먼 식의 근본적인 경험주의를 취하든, 과학적 이론들이 제시하는 법칙이나 메커니즘에 대해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든, 이론과 경험이라는 두 이질적인 요소를 조합하지 않으면 과학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조작 절차를 ‘교량’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일 듯 하다. 그렇다면, 브리지먼과 헴펠의 차이는, 경험주의에 좀 더 중립적인 방식으로 과학 이론에 대한 해명을 추구했는지(헴펠), 아니면 경험주의의 근본적 원리를 끝까지 추구했는지(브리지먼) 사이에 있는 것 같다.  

4.4 장하석에 의한 복권, 그리고 +α

최근 조작주의는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장하석의 흥미로운 논평 덕분이다. 그는 『온도계의 철학』(동아시아, 2013)이나 최근의 스탠포드 철학 사전4)을 통해 조작주의가 과학의 실천에 대해 무시하기 어려운 규범적 주장을 내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장하석이 주목하는 것은, 앞서 나는 ‘원심력’이라고 말했던 과학적 개념의 ‘확장’ 국면에 대한 브리지먼의 통찰이다. 

이 국면의 핵심은, 앞서 논의했듯 본래 개념이 최초로 고안되었던 맥락 바깥에도 적용되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익숙한 규모의 길이와 우주적 규모 또는 원자적 규모의 길이에 대해 일관된 길이 개념을 제시해야 하는 맥락이 바로 그것이다. 장하석은 여기서 브리지먼이 이론의 경험적 내용을 늘려야 한다는 금언으로 이뤄진 ‘확장의 철학’을 내놓았다고 평가한다.

장하석은 이러한 ‘확장의 철학’이 과학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 데 지금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5) 일례로, 조작주의는 과학적 개념의 외연(=지시 대상)을 해명하는 데 매우 유용해 보인다. 개념과 연결된 조작적 절차는, 형이상학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고 인식적으로는 접근이 제한된 경험 데이터 배후의 실재보다 형이상학적으로든 인식적으로든 논란이 덜한 대상이며, 따라서 개념의 지시 대상 역시 명확하게 해 준다. 게다가 이 입장은, 실제 과학자들의 실천이 가진 성격을 철학자들 특유의 이상화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방식으로 조명할 수 있는 입장처럼 보인다. 깔끔하게 정리된 이론을 여러 부분에 응용하여 설명을 구성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복잡한 데이터를 정리하는 것이 과학자들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제안하는 브리지먼에 대한 독해 역시, 장하석의 이러한 논평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평은 조작주의의 분석이 그 배경에 깔고 있는 과학의 의미론, 인식론, 형이상학 사이의 체계적 관계에 대해서는 조명을 비추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그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최소주의를 통해 성공적인 측정 절차들이 도달한 비교동등성을 이해하려는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고 , 또한 이런 입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과학사의 풍부함을 더욱 강조하려는 논의 전술을 택한 것 같다. 2부에서 이 비교 동등성을 심층적으로 검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브리지먼의 논의가 과학 전반의 구조와 목표에 대해 가진 함축을 드러내기 위해 의미론, 인식론, 형이상학이라는 조금 더 전통적인 틀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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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하나의 개념이 다른 여러 개념을 통해 규정된다는 이야기는, 조작 절차를 통해, 즉 절차의 표적이 되는 개념과 독립적인 여러 개념을 조합한 측정 절차를 통해 개념을 규정하려 하는 방법 속에서는 사소하게 참이라는 브리지먼의 언급이 있다(『논리』 25쪽).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의미론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상대성이 인식적, 형이상학적 상대성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실수처럼 보인다.

2) 흥미롭게도 바로 이 문제는 심리철학의 핵심 문제로 등극했다. 이른바 감각질(qualia) 문제를 다룬 다양한 문헌이 있다. 다음 두 문헌의 사고실험이 흥미롭다. Nagel, Thomas. ‘What Is It Like To be A Bat?’, Philosophical Reviews, 4, 1974. Jackson, Frank. ‘Epiphenomenal Qualia’, Philosophical Quarterly, 27, 1982. 전자는 우리가 초음파를 통해 주변을 보는 박쥐가 되었을 때의 감각질을, 그리고 후자는 태생적으로 맹인이었다가 개안수술을 통해 처음 색깔을 보게 된 광학자 메리의 감각질을 다루는 철학 논문이다. 

3) 카를 C. 헴펠, 곽강제 옮김, 『자연과학철학』, 서광사, 2010: 6-7장의 논의가 초점이 될 것이다.

4) Chang, Hasok, "Operationalism",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9/entries/operationalism/>. 이 사전의 서술 가운데 특히 2절은 그동안 헴펠 등의 부적절한 주석 덕분에 브리지먼의 논의가 어떻게 저평가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5) Chang, Hasok, "Operationalism" 3절의 논의를 간략히 요약한 것임을 밝힌다. 

정보출처: BRIC 바이오통신원
<본 기사는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 또는 개인에 의해 작성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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